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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마의 심리학- "인디언" 단어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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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그리기와 이름 붙이기는 권력 현상이다. 콜럼버스가 1492년 아메리카를 ‘발견’하여 ‘인도’라고 우기면서, 그곳에 사는 원주민들을 ‘인디언’이라고 불렀던 것은 실수라고 치자.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네번의 항해>(1507)란 책의 서문에서 발체뭘러는 이 대륙이 유럽인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신세계’라고 말했다. 그래서 탐험가의 이름을 기념하여 ‘아메리카’로 명명했다. 이어 1513년 바스코 누녜스 데 발보아가 다리엔 지협(파나마)를 횡단하여 ‘서쪽 바다’(태평양)을 발견하자, 아메리카가 더이상 ‘인도’가 아닌 것이 명백히 증명되었다. 그렇지만 스페인 사람들은 물론 유럽의 식자층은 여전히 인도(las Indias)와 ‘인디언’이란 말을 지도와 역사서에다 계속 썼다. 마젤란에 의해 세계일주가 이뤄지고, 아메리카와 인도 사이에 지구 반 바퀴 이상의 거리가 놓여 있다는 점이 밝혀지자 궁색했던지, 이번에는 ‘동인도’, ‘서인도’란 말을 고안해냈다. 원조 인도는 ‘동인도’로, 아메리카는 ‘서인도’로 명명했던 것이다. 동아시아와 태평양이란 심연이 놓여 있었건만 영국인도, 네덜란드인도 그 둔한 거리 감각에서 자유롭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들도 모두 아시아 무역을 전담하는 회사를 ‘동인도회사’로 명명했다. 아니, 아직도 우리는 ‘아메리카 인디언’이란 말을 즐겨 사용하고 있지 않는가?


왜 혼란스럽기만 한 ‘인디언’이란 말을 버리지 않았을까? 그 이유는 인디언이란 호명에는 서양인들이 아메리카 지배를 정당화하고 영속화하는 언어심리학적인 메카니즘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리라. 인디언이란 호명은 정복자들이 지배를 위해 행한 최초의 분류 작업이었다. 이 분류작업에는 철학적-신학적 논쟁이 수반되었다. 정복자들이 ‘인디언’들을 발견했을 때에, 스페인의 식자층들이 처음 벌인 논쟁은 “도대체 인디언이 사람일까?”였다. 정복자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신학자들은 인디언들이 ‘말하는 도구’(instrumentum vocale)에 속하므로 노예 취급을 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노예’ 이론을 동원한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의 입에서 나온 소리였다. 물론 이에 반박하는 원주민 보호신학도 등장했다. “하느님 앞에 인간은 평등하다”는 논리를 내세우며, 원주민의 인격성이 타락한 유럽인들보다 훌륭하다는 신학자들도 등장했다. 그렇지만 모두 ‘인디언’이란 말은 포기하지 않았다. 어떤 방식으로든지, 인디언은 지배와 훈육, 또는 선한 통치의 대상이거나 그 영혼이 정복되어야 할 대상이었다. 지배대상으로 타자화하는 단어가 ‘인디언’이었다.


이런 명명법의 논리는 파시즘의 언어정치와 유사하다. 히틀러의 제3제국은 ‘지배민중’(Herrenvolker)에 봉사하는 주변민중(Randvolker)을 구성하는 ‘하위인간’(Untermenschen)이란 개념을 제조해내었다. ‘인디언’이란 말은 바로 이 지배대상인 ‘하위인간’에 가장 유사한 명명법이리라. 그런 점에서 ‘인디언’이란 말은 유대인들에게 달아주었던 ‘다윗의 별’ 표시와 같은 기능을 한다. 아메리카가 인도가 아님에도 오늘날까지 ‘인디언’이란 말이 사용되는 이유이리라.


‘인디언’이란 말이 파시즘적 언어 구사법이라면 그럼 대안은 무엇일까?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인디언(인디오)란 말 대신, ‘인디헤나’란 말을 선호한다. 요즈음 미국의 인류학자들도 대부분 이 말을 사용한다. 우리말로 옮기면 ‘원주민’이다. 다소 서술적이고 추상적이며, 오랜 수탈과 억압의 역사를 은폐하고 있는 비역사적 말이라는 문제점은 있지만, 비교적 중립적인 용어이다. 이제부터라도 ‘인디언’, ‘인디오’란 단어는 지우고 (아메리카) ‘원주민’이라고 쓰자.


‘인디언’이란 언어의 폭력.


출처-http://www.zizz.x-y.ne